.“사실, 서양미술의 중심은 인물이다. 특히 구상미술은 인물이 중요하다. 풍경이나 정물은 극적 요소가 없다. 거기에 비해
인물은 표정이라든가 몸짓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전부 이야기가 될 수 있고 표현될 수 있다. 서양 미술이 교회나 궁정처럼 본인들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미술이라면 우리 동양 미술은 옛날부터 즐기기 위한 그림을 그렸다. 지금도 많은 구상작가들이 산수화를 그리며 대중들도 그런 것을 선호한다. 관객들은 인물은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작가로서는 인물을 표현하고 싶다.
‘둥근달이 떠오른 밤
소쩍새 우는 소리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
스산한 바람에 떨리는 나뭇잎들의 울림을 들으셨습니까?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너그럽고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기쁜’
그런 끊임없이 돌아가는 인생살이 속에 우리가 실려져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그런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오랜 선조들은 원시시대부터 소리를 질러 노래를 불렀고 온갖 몸짓으로 춤을 추었으며, 온갖 풀과 돌을 찧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의 표현을 위해서 우리 인간들은 우리들 스스로의 몸을 통하여 이룩하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아마 그것은 우리 인간의 모습, 그 자체가 위대한 자연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포용하고 용해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높은 봉우리와 산이 있고, 넓은 벌판과 숲이 있으며, 계곡이 있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앉을 수도 있으며, 서서 있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는 그 무궁한 변화에 압도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 인간의 모습에서 우리 인생살이의 외로움과 너그러움, 슬픔과 기쁨을 가장 다정스럽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1994년 ‘청풍’지 ‘여인’」 중에서 –